본문 바로가기

Scrap/Fashion scrap

장 폴 고티에 어떤 인물이죠?

질문]

장 폴 고티에,,

굉장히 유명한 디자이너죠?

어떤 인물 인가요??



답변]


이름 : 장 폴 고티에 (본명 : Jean Paul Gaultier)
출생 : 1952년
출생지 : 프랑스
경력 : 1976년 자신의 이름으로 첫 컬렉션 발표
1978년 스타일리스트로서 가야시마 프랑스와 계약
1986년 파리 뷔뷔엔느 거리에 부티크 오픈
수상 : 1984년 저널 드 텍스타일 지 선정

패션계의 앙팡 떼리블(l'enfant terrible : 무서운 아이)은 파리 교외의
Arcueil의 평범한 프랑스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지기 미학자인 할머니의 영 향으로 여성의 화장품과 의상이 연출하는
결과로 생기는 변신에 흥미를 느낀다.

고등학교 때까지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는 패션잡지와 Cardin이나 Saint-Laurent 같은
위대한 디자이너의 영향을 받고, 15세 때부터 열심히 작품을 디자인한다.
이런 어린 시절에 저절로 형성된 교육은 패션계로 뛰어들 게 하는 원인이 된다.
Jean-Paul Gaultier의 부모는 그의 스케치를 팔아서 용돈으로 사용하라고 권하는 등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래서 그는 우편으로 디자이너 샵에 일련의 스케치를 보낸다.
18살이 되던 날에 파트 타임으로 그 를 고용하겠다는 Pierre Cardin의 답장을 받는다.

1971년에 쟝 뽈 골띠에는 몇 달 동안 Jacquis Esterel 샵에서 보내다가 Patou 샵에 들어간 후,
1974년에 다시 가르댕 샵에서 일한다. Gunnar Larsen에 의해 선택된 수영복 스케치는
Createur-Industrie d'Audree Putman 그룹이 Mode Internationale에서 발행했던 것과
결합시킨 것으로 이 스케치로 Saint와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콜렉션을 갖고 싶은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Saint Pierre 시장에서 산 직물과 짚으로 엮은 테이블 세트를 탑 모델인
오랜 친구 Anna의 도움으로 1976년에 Palais de la De couverte에서 첫 번째 콜 렉션을 발표한다.
이 콜렉션에서부터 앞으로 그가 지향하는 경향-락 음악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사회. 문화적 모든 풍조에 대한 민감성, 세 번째 콜렉션에서는
끈 없는 브래지어와 Punk식의 검은색 타이즈와 Dolce Vita 스타일의 스커트를
결합했다-을 특징 지웠다. 그러나 이런 것에는 단단한 구 조가 결핍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을 1978년 Kashiyama 메종에서 발견하는 데, 1981년부터 이탈리아인인
Gibo의 후원과 Equator 덕택으로 보완된다. 1988년 쥬니어 고띠에 Junior Gautier 라인을 런칭하고
1992년 고띠에 진 Gautier Jean을, 1993년 쟝 뽈 고띠에 향수도 사업을 벌인다.
1994년에는 기존 고띠에 진을 스포츠 캐쥬얼에 접목시킨 JPG로 바꾼다.
1991년 - 95년까지 프랑스 패션지인 쥬르날 드 텍스틸(Journal de Textile)에서 인기 1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1997년 그의 첫 오뜨꾸뛰르 콜렉션을 발표하였다.
쟝 폴 골띠에의 콜렉션은 '제임스 본드(James Bond)'(1979~80년 겨울),
'하이-테크(High-tech)' (1981~81년 겨울), '르 다다이듬 (Le Dadaisme)' (1983년 여름) 등과
같이 한가지 테마만으로 만들 어진다.
마륄렌느 델브르그- 델피가 쟝 뽈 골띠에에게 바친 전공논문
"생활을 위한 패션(La Mode pour la vcl)"에서 강조한 것처럼 그의 콜렉션은
모양을 내는 시대에 초연한 태도를 취하는 지식을 되찾게 하 거나 준비하게 하고,
잠재적 문화의 유산에 속하게 한다. 그는 1984 년에 첫번째 남성용 라인을 발표하고,
1985년에 '르 데필레(Le Defile)'라는 제목이 붙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
리젠느 쇼삐노(Regine Chopinot)와 협력한다.

장 폴 고티에가 1976년에 최초의 독자적인 콜렉션을 발표한 것은 24 살 때의 일이었다.
밀짚으로 만든 식탁 용구로부터 영감을 얻은 패션 쇼를 파리의 Palais de la Decouverte에서
감상한 소수의 사람들 은 콜렉션이 관심거리가 못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오늘날, 고티에의 패션쇼 초대권은 얻어내기가 지극히 어려워졌다.
재봉사에서부터 마돈 나에 이르기까지, 고티에의 모든 팬들은 초조하게
디자이너의 신 작품 들을 기다린다.

세계적인 패션 전문가 및 유명 바이어들이 인정하는 초 거물급
디자이너 장 폴 고티 에(Jean-Paul GAULTIER).
프랑스의 유명 섬유업계 잡지인 "저널 드 텍스타일(Journal du Textile)"에서
연2회 실시하 는 인기투표에서도 고티에는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특히 젊은 층 세대서 고티에는 신적인 존재거나 우상 적인 존재로 받아들 여 지고 있다.
그는 1978년 파리 컬렉션에 데뷔한 이후 기상천외하고 섹시하게 때로 는 유머스럽고
도발적으로 메세지를 표현하는 등 항상 새로움을 선보였다.
생활인의 센스로 고티에 옷을 입어보면 전위와 클래식을 현대적으로
멋지게 연출 한 패션을 실감할 수 있다.

패션계의 악동 장 폴 고티에. 스스로를 무서운 아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는
매 시즌마다 섹시한 여성스러움과 중성적인 분위기, 향락주의와 종교, 부르조와의 전통과
길거리 문화 등 서로 모순되는 요소들을 믹 스시켜 왔다.
한마디로 그의 특기는 쟝르 성 별 문화 등 상식이라는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이종교배와 혼합을 유머스럽고 도발 적으로 표현 하는 것이다.
남자들에게 스커트를 입히고 속옷을 겉옷으로 만들어 버 린 상식 파괴의 대명사.
평범함을 거부하고 섹시 쇼킹 전위 유머 도전 이라는 이미지 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표현해 내는 흥미로운 패션세계. 어떤 의미에서 화려한 그러나 개개인의 감정이
돋보일 수 있는 개성 있는 스타일로 고티에 라인은 전개된다.

고티에는 마돈나의 블론드 엠비션 투어를 위해 뾰족한 콘 브래지어를 디자인한
패션계의 아이디어맨 이기도 하다. 특히 언더웨어를 아웃웨 어화한 점은 호평 받고 있다.
고띠에 패션은 언뜻 보면 대담하고 파격 적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아이템 하나하 나를 자세히 뜯어보면 의외로 쉽게 입고 다닐 수 있는
트렌디한 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의상들은 무대를 위해 코디 되었던 액세서리를
떼어내고 나면 누구나 어 느 장소에서나 입을 수 있는 완벽한 의상들이기 때문에
패션 세계에서 는 물론이고 연예계 그리고 전세계의 여러 대도시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지난 '97년 S/S 컬렉션에서 장 폴 고티에의 오뜨꾸뛰르 입성은 패션 계 화제중 하나였다.

"여성들이 의상을 선택하고 입는 행위는 하나의 즐 거움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시대상황을 반영하면 서도 옛스러운 스타일과 혼합한 실루엣을

보여주는 고티에. 하나의 디 자인속에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담으려 하는 고티에는

디자인을 단순 화해 클립 대신 지퍼와 단추를 사용했고

바쁜 현대여성의 편의를 위해 주머니를 여러개 달아 기능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의 컨셉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82년에는 가터벨트를 드러낸 창녀스타일

85년에는 반은 스커트 반은 팬츠인 앤드로지니어스룩 86년부터

87년에는 중후한 러시아룩 89년에는 유두 피어스로 익살스런 분위기를 살린

속옷 스타일의 펑크룩 '94년부터 95년에는 에스키모 룩을 등 장 시켰다.

'96년 S/S 컬렉션에서는 사이버 피리 룩을 등장시켜 베이직과 유니크한

이질감의 아이템을 조합했다.

'97년 S/S 컬렉션에서는 남성 테마 사리(SARI)에서 길고 슬림한 엘리건트한

실루엣과 함께 강 렬한 인도풍의 색감 및 실루엣을 선보였다.

여성테마 빠리지엔느 펑크 (La Parisienne Punk)에서는 겹쳐있는 듯 보이나

실은 연결된 한장 의 옷 이 주류를 이루는 컬렉션을 보인다.

소재는 실크 샤틴 비스코스 폴 리에 스테르 진즈 등과 함께 이국적인 프린트물이 사용되었다.

'97 F/W 컬렉 션에서는 뉴 클랙식(New Classic)을 주제로 정해 놓고 따뜻한 인간미가

들어가 있는 라인을 소개했다.

그의 옷에는 터부를 깨는 통쾌한 역설이 있다.

턱시도에 코르셋 입기, 바지위에 속옷 입기 등. 전통적인 것의 파괴와 이질적인 것의
혼합은 고티에 패션에서 빠질수 없는 명제다. 모든 금기에 도전하며 80년대를
종횡무진 휘저었던 패션계의 악동이 21세기를 앞두고 자연파로 변신 하고 있다.
"파괴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새로움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시대 도 아닙니다.
80년대의 사회는 터부를 무너뜨리는 도발을 받아들이려 는 기세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불황인 지금은 모험과 도발 바로 그것 이 터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나 자신 또한 도발적인 것에 지쳤습 니다.
지금까지의 자신과 또 하나의 다른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습니 다.
도발적인 것이 아니고 어느 의미에서는 화려한 그러나 사람 각각 의 훌륭한 점을 보여줄 수 있는..."
라는 말을 덧붙였다.

고티에는 '94년 봄여름 컬렉션부터 과격함에서 벗어나 자연파로 변신 하기 시작했다.
그는 금기를 파괴하는 요소보다 좀더 본질적인 것을 추 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몸. 그의 향수병에서도 알수 있지만 늘 글래머스한 점을 지향한다.
코르셋을 겉옷으로 다시 복귀시 킨 것도 그렇지만
그는 유난히 속옷 섹시즘에 강하고 몸 그대로를 응 용하는 것에 천재적이다.

세기말. 고티에는 파괴보다는 에이즈와 종교 민족 등 다른 문화의 융합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옷은 여전히 박력 있 고 급진적이다.
"예전처럼 도발적이진 않지만 사람들마다 제각기 가지 고 있는 자연체로서의
훌륭한 점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저의 라 인 은 화려합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 그의 패션은 어떤 방향 으로 흘러갈까?
세계 패션인의 이목은 그가 매년 발표하는 컬렉션 라 인에 집중돼 있다.
30세전 톱 디자이너로 부상.
쟝 뽈 고띠에는 영화 속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발휘하였는데,
그데뷔는 1989년 그리너웨이 김독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 고 그녀의 정부라는
작품에서부터이다. 그리고 진실 또는 대담에 서 마돈나의 블론드 엠비션 투어를 위해
뾰족한 콘 브래지어를 디자 인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주네 까로 감독의 잃어버린 아 이들의 도시에서는
영화 미술과 의상 디자인을 담당하게 된다.
대 성공이었다.
섹슈얼, 쇼킹, 전위적인 이미지. -
그는 놀라운 상상력의 소유자로 천 부적인 끼와 자유로운 창작성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제 5원소의 경 우 뤽 배송 감독과 아이디어를 주고 받으며 단순히 의상에만 아니라
영화의 시각적 환상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